영락 (고구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영락은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1년에 제정한 고구려 최초의 연호이다. 이는 중국의 속국임을 인정하는 기존의 연호 사용에서 벗어나,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선언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영락 연호는 391년부터 412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광개토대왕은 백제, 거란, 왜, 후연 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고 세력을 강화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영락 (고구려) | |
---|---|
기본 정보 | |
연호 | 영락 (永樂) |
사용 기간 | 알 수 없음 |
국가 | 고구려 |
군주 | 광개토대왕 |
설명 | 알 수 없음 |
이전 연호 | 알 수 없음 |
다음 연호 | 알 수 없음 |
2. 연호 제정의 배경과 의미
'''영락'''(永樂)은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뜻이다.[1]
2. 1. 정치적 배경
광개토대왕은 즉위한 391년을 원년으로 하는 최초의 연호 "영락"을 창설했다고 여겨진다. 종래에는 고구려는 중국 황제가 천제의 아들로서 천하를 지배하라는 명을 받아 그 지배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에도 미치는 것을 표상하는 중국 연호의 사용을 받아들여 중국의 속국임을 인정했다.[1] 고유 연호를 세우는 것은 중국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고구려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의미한다.[1]2. 2. 역사적 의의
광개토대왕은 391년에 즉위하여 원년으로 삼고, 최초의 연호인 "영락"을 제정하였다. 이전까지 고구려는 중국 황제가 천제의 아들로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명분을 받아들여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중국의 속국임을 자처했다.[1] 그러나 고유 연호의 제정은 중국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자,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선언하는 의미를 지닌다.[1]3. 연대 대조표
영락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15년 | 16년 | 17년 | 18년 | 19년 | 20년 | 21년 | 22년 |
서력 | 391년 | 392년 | 393년 | 394년 | 395년 | 396년 | 397년 | 398년 | 399년 | 400년 | 401년 | 402년 | 403년 | 404년 | 405년 | 406년 | 407년 | 408년 | 409년 | 410년 | 411년 | 412년 |
단기 | 2724년 | 2725년 | 2726년 | 2727년 | 2728년 | 2729년 | 2730년 | 2731년 | 2732년 | 2733년 | 2734년 | 2735년 | 2736년 | 2737년 | 2738년 | 2739년 | 2740년 | 2741년 | 2742년 | 2743년 | 2744년 | 2745년 |
간지 | 신묘(辛卯) | 임진(壬辰) | 계사(癸巳) | 갑오(甲午) | 을미(乙未) | 병신(丙申) | 정유(丁酉) | 무술(戊戌) | 기해(己亥) | 경자(庚子) | 신축(辛丑) | 임인(壬寅) | 계묘(癸卯) | 갑진(甲辰) | 을사(乙巳) | 병오(丙午) | 정미(丁未) | 무신(戊申) | 기유(己酉) | 경술(庚戌) | 신해(辛亥) | 임자(壬子) |
4. 주요 사건
391년부터 412년까지 광개토왕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연도 | 사건 |
---|---|
391년 (영락 원년) |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즉위. 연호를 영락으로 정함.[2] |
392년 (영락 2년) |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북쪽 변경을 공격, 석현성 등 10여 개 성 함락.[3] |
393년 (영락 3년) | 관미성에서 백제군 격퇴. 평양에 9개 절 창건.[4] |
394년 (영락 4년) | 수곡성에서 백제군 격퇴. 남쪽 변경에 7개 성 축조.[5] 패수에서 백제군 8000여 명 생포/사망.[6] |
395년 (영락 5년) | 염수에서 거란족 패려 정벌, 복속. 수많은 가축 노획.[7] |
396년 (영락 6년) | 백제 공격, 아리수 이북 58개 성, 700여 개 촌락 점령. 위례성 포위, 백제 아신왕 항복.[2] |
399년 (영락 9년) | 평양 순행. 백제와 왜의 공격을 받은 신라의 구원 요청. |
400년 (영락 10년) | 신라에 5만 대군 파견, 왜군 격퇴. 금관가야 종발성까지 추격. 신라 왕 교체 (내물 마립간에서 실성 마립간). 후연 모용성의 신성, 남소성 공격. |
402년 (영락 12년) | 후연의 숙군성 공격, 함락.[2] |
404년 (영락 14년) | 대방 지역에서 백제와 왜군 궤멸.[8] 후연 정벌, 연군(燕郡) 함락. |
405년 (영락 15년) ~ 407년 (영락 17년) |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에서 후연군 격파.[8] 407년 5만 군대로 후연군 격파, 6개 성 점령.[8] 남연과 우호 관계.[8] |
408년 (영락 18년) ~ 410년 (영락 20년) | 408년 후연 멸망 후 고운의 북연 건국, 후연과 우호 관계.[8] 409년 동쪽에 독산성 등 6개 성 축조, 평양 백성 이주, 남쪽 순행. 410년 동부여 공격, 굴복.[9] |
412년 (영락 22년) | 광개토왕 서거. 《삼국사기》에는 413년 사망 기록.[2] |
4. 1. 원년 (391년)
원년 (391년)에 아버지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2] 새 나라의 연호는 영락이다.4. 2. 2년 (392년)
392년 7월, 광개토왕은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3]4. 3. 3년 (393년)
393년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관미성에서 격퇴하였다. 광개토왕은 평양을 크게 중시하여 393년에 9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였다.[4]4. 4. 4년 (394년)
水谷城중국어에서 백제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394년에 고구려는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의 성을 쌓았다.[5] 395년에는 패수에서 백제군 8000여 명을 생포하거나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6]4. 5. 5년 (395년)
395년 광개토왕은 염수(鹽水)로 진출하여 거란족 패려(稗麗)를 정벌하고 복속시켰으며,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들을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7]4. 6. 6년 (396년)
396년 광개토왕은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백제 아신왕에게서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아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고 개선하였다.[2]4. 7. 9년 (399년)
4. 8. 10년 (400년)
400년에 광개토왕은 신라에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쳤다.[8] 이때 왜군은 금관가야 종발성까지 퇴각하였고, 고구려군은 금관가야 지역까지 쫓아가 왜군을 격퇴시켰다. 광개토왕은 400년에 신라를 구원하면서 신라 왕을 내물 마립간에서 실성 마립간으로 교체하였다.400년 2월, 광개토왕의 고구려 주력군이 신라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있을 때 후연 왕 모용성은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공격하였다.
4. 9. 12년 (402년)
402년에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2]4. 10. 14년 (404년)
404년, 광개토왕은 대방(帶方) 지역으로 쳐들어 온 백제와 왜군을 궤멸시켰다.[8] 같은 해 광개토왕은 후연을 정벌하고, 연군(燕郡)까지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연군은 지금의 베이징 근방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 기록에 따라 베이징 일대까지 정복했다는 주장이 있다.4. 11. 15년 (405년) ~ 17년 (407년)
405년 후연이 다시 공격해오자 광개토왕은 요동성에서 격파했다.[8] 406년에는 목저성(木抵城)에서 격파하여 요동 점령을 확고히 했다.[8] 407년 광개토왕은 5만 군대를 동원하여 후연 군대를 격파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후연의 6개 성을 점령했다.[8] 광개토왕은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南燕)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8]4. 12. 18년 (408년) ~ 20년 (410년)
- 영락 18년(408년)
- * 후연이 멸망하자 고구려계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였다. 광개토왕은 408년에 후연과 우호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8]
- 영락 19년(409년)
- * 광개토왕은 409년에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으며,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 영락 20년(410년)
- * 광개토왕은 410년에 동부여(東夫餘)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9]
4. 13. 22년 (412년)
412년 광개토왕이 서거하였다. 《삼국사기》에는 413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2]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칭했으며, 광개토왕릉비에서 다음 8건의 영락 연호 사용례가 확인된다.
- 영락 5년 을미
- 6년 병신
- 8년 무술
- 9년 기해
- 10년 경자
- 14년 갑진
- 17년 정미
- 20년 경술
영락 원년은 391년(신묘년)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광개토왕기 및 동서·연표, 《삼국유사》 왕력에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을 임진년(392년)으로 적고 있어, 비문에 기록된 연대와 1년 차이가 있지만, 광개토대왕의 치세가 22년에 달한 것을 근거로 영락 연호도 22년째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5.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7世紀以前の中国・朝鮮関係史
法政大学経済学部学会
2020-03-20
[2]
서적
삼국사기
[3]
서적
삼국사기
[4]
서적
삼국사기
[5]
문서
이상의 대(對)백제전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년이 기준이다.
[6]
서적
삼국사기
[7]
논문
廣開土王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고구려의 北方進出과 廣開土王碑文
歷史學報, 高句麗硏究會
[8]
문서
이상의 대(對) 후연전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년 기준이다.
[9]
문서
일부 학자들은 동부여가 이미 고구려의 속국으로 존속하고 있었으며, 이때의 동부여 정벌로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김용만, 앞의 책, 271쪽) 또한, 일반적으로 광개토왕 평생의 업적으로 해석되는 64개 성, 1,400촌의 정복 기록을 5개의 압노(鴨盧), 즉 동부여의 5부 전체를 복속시켜 동부여를 완전히 멸망시켜서 얻은 결과로 보는 주장도 있다. (위의 책, 274~278쪽)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